칠곡군 북삼읍 숭오리 강진마을에 있는 만송 유병헌 생가터와 북망통곡이라고 새긴 통곡바위를 찾아보았다.
경상도 칠곡의 시골 유생 유병헌(劉秉憲)은 을사늑약(乙巳勒約)과 연이은 경술국치조약(韓日倂合條約)이 체결되자 매일 ‘통곡바위’에 올라 북향재배하며 통곡하다가 임자년(1912년)7월25일 그 ‘통곡바위’에 "북망통곡(北忘痛哭) 오왕불망(吾王不忘)”을 새겼다.
그는 또한 일본의 작위거부, 은사금거부, 총독부조세거부 ‘3거부운동’을 만 천하에 알리는 논설격문 『은수변파록(恩讐辨破錄)』을 서구 각국 공사관(美, 中, 法, 露, 日)과 관계요로(官界要路) 및 전국유림(全國儒林)에 배포하고, 일제와 매국노 이완용 및 을사5적을 통렬히 규탄함으로써 대한제국의 국가정체성을 일깨웠다.
이어 주위 유림과 지사들에게 직접 방문하여 세금은 일제통감부에 내지 말고우리 조정에 낼 것을 종용 호소했다. 또한 그는 논밭을 팔아 비밀리에 독립군자금 각출 및 비밀송금 등으로 9년간 항일투쟁을 이어왔다.
1918년 일본헌병에게 피체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일왕의 머리로 내 술잔을 만들지 못함이 애석할 따름이다.” 라고 일본을 대갈(大喝)하고, “왜놈이 주는 음식은 먹지 않겠다.”라고 성토하며, 곡기(穀氣)를 끊고 7일 만에 단식자결 순국했다.
문희공 선암 유선생 영정각 유지비. 조선개국 공신 선암 유창의 영정각 옛터에 새운 비
문희공 선암 유선생 영정각 유지비 바로 뒤에 있는 통곡바위
이 석벽에서 만송 선생께서 매일 의관을 정제하고 통곡하시며 임금에게 북향재배 하던 유허지다.
칠곡군 북삼읍 숭오리 220번지 만송 유병헌의 고택 터다. 주민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250여평의 집터엔 5동의 기와집이 있었으며 이곳에 만송 유병헌을 찾아 수많은 문인들이 왕래하였다고 한다.
집터를 나타내는 담장은 거의 허물어져 일부분만 남아있다. 독립기념관 사료에 의하면 만송 유병헌 집터는 국내항일운동사적지로 소개되어 있다.
칠곡군과 북삼읍은 지역 출신 독립운동가에 대한 무관심으로 만송 유병헌 선생 독립운동 역사는 잊혀진채로 방치되어 있다.
만송선생은 1915년 3월에 안정근(安靖根;안중근의사 동생), 4월에 송상도(宋相燾;기려수필 저자), 10월에 한용운(韓龍雲) 스님 외 수 많은 지사(志士)들이 내방(來訪)하여 독립군자금 조달처로 지목되니 선생은 1918년 정월 대구검사국(大邱檢事局)의 취조를 받고 동년 2월20일 법정에서 “너희 왜왕의 머리를 베어 내 술잔 못 만듬이 유감(遺憾)이다.” 라고 큰소리로 호통 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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