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원의 아들은 양녕대군, 효령대군, 충령대군이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왕위에 오른 세종이 바로 충령대군이다. 수양대군은 충령대군과 소헌왕후의 둘째 아들이다.
큰아버지 양녕대군이 폐위되고 아버지가 세자가 되어 세종으로 즉위하자 왕자가 되었다. 수양대군은 문종의 동복동생이자 안평대군 금성대군 등의 친형이며 단종의 숙부이다.
수양대군은 왕위 찬탈과정에서 조카는 물론이고 동생 둘을 죽였다. 그 뿐만이 아니라 성삼문,하위지,박팽년,이개, 유성원, 유응부등 사육신과 그들의 삼족을 죽이고 그에 관련된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피비린내 나는 왕위 찬탈 후 그는 14년간 권좌를 누렸다.
① 왕족으로 죽은 육종영(六宗英)에 안평대군 이용 · 금성대군 이유 · 화의군 이영 · 한남군 이어 · 영풍군 이전 · 하령군 이양
② 단종의 외척으로 죽은 사의척(四懿戚)에 송현수 · 정종 · 권자신 · 권안
③ 계유정난 때 죽은 정승으로 삼상신(三相臣)에 황보인 · 김종서 · 정분
④ 판서로서 죽은 삼중신(三重臣)에 민신 · 조극관 · 김문기
⑤ 장수로서 죽은 양운검(兩雲劒)에 성승 · 박쟁
⑥ 주동자로서 죽은 육신(六臣)에 박팽년 · 성삼문 · 하위지 · 이개 · 유성원 · 유응부
오늘날 박정희의 쿠테타와 전두환의 정권 찬탈과정에서 수많은 국민들을 죽인것 처럼 조선시대에서도 정권찬탈을 위해 수많은 군신들을 죽임으로 권력을 잡은 것이다. 단죄못한 역사는 되풀이 되는 것이다.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 암살 계획에 가담한 주요 인물로는, 성삼문을 중심으로 그의 아버지인 성승을 비롯하여 성삼문과 평소 가깝게 지내온 이개, 하위지, 유성원, 김질 등의 문인들과 무인 유응부를 비롯하여 단종의 외숙인 권자신 등이 있다. 수양대군 암살 계획이 차질을 빚자 김질이라는 자가 배신을 하게 되고 이를 장인 정창손에게 알려 수양의 귀에 까지 들어 가게 되면서 거사는 실패하게 된다.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죽음을 당한 6명의 신하 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박팽년(朴彭年)·유응부(兪應孚) 사육신을 기려 세운 비석. 하단에는 여섯 마리의 거북이 받쳐있고 상단에는 열 두 마리의 용들이 절의를 지킨 신하를 호위하는 형상의 비석이다. 사육신 중 단계 하위지는 선산이 고향이다.
죄측에 숭정사로 들어가는 성인문이 보인다. 삼촌에게 왕권을 빼앗긴 어린 왕 ‘단종’의 복위를 꾀하려다 숨진 사육신으로 일컫는 조선 세조 때의 박팽년, 성삼문, 이개, 유성원, 하위지, 유응부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사당 대문을 들어가면 정면에 홍살문이 나온다.
박일산이 1479년에 세운 보물 제554호인 태고정(太古亭). 박일산이 아흔아홉 칸의 종택을 지으면서 세운 별당 건물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사당과 태고정 등 일부만 남았다. 태고정에 걸린 태고정 현판 글씨는 한석봉의 글씨이고, 일시루 현판 글씨는 안평대군의 글씨로 전한다.
계유정란(癸酉靖難) 무렵 박팽년의 아버지 중림(仲林)과 그의 4형제는 물론 그의 아들 3형제인 헌(憲), 순(珣), 분(奮)과 육신(六臣)의 손자들까지 삼대가 모두 처형되어 멸족(滅族)의 참화를 당하고, 아녀자들은 공신의 노비(奴婢)가 되거나 관비(官婢)가 되어 가야만 했다.
그 무렵 박팽년의 둘째 아들 순(珣)의 부인 성주 이씨(星州李氏)도 관비(官婢)가 되어 고향인 경상도 닭밭골로 내려와 살았는데 집의 몸종과 함께 임신 중이었다.
그후 이씨 부인은 아들을 낳고 몸종은 딸을 낳았다. 당시 세조는 역적의 후손된 남자는 누구나 죽이라 하여서 외할아버지가 이를 감추기 위해서 아이 이름을 박비(朴婢)라 하고 비밀리에 여종이 낳은 딸과 바꿔 길러서 기적적으로 사육신 중 오직 하나 박팽년의 혈손(血孫)만이 남아 대를 잇게 되었다. 그가 바로 사육신 중 유일하게 혈육을 남긴 박팽년의 손자 박일산(박비)다.
박팽년의 후손으로 대사성을 지낸 바 있는 서정공(西亭公) 박문현(朴文鉉)의 주택으로 1778년에 건립하였으나, 19세기 중반에 도곡공(陶谷公) 박종우(朴宗佑)의 재실(齋室 : 유생들이 공부하는 집)로 사용하면서 그의 호를 따 당호(堂號)를 도곡재(陶谷齋)라 하였다.
솟을대문을 하고 있는 도곡재 대문채.
도곡재 샛길로 나가는 길에서 바라본 도곡재
도곡재 내의 작은 연못 : 조선의 전통정원에서만 볼 수 있는 연못이다. 천원지방天圓地方의 뜻을 내포하고 있는 방지원도는 음양오행설이 담겨 있으며 당시의 사상이었던 성리학의 철학을 보여주는 조선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정원문화이다.
육신사 앞 도로
육신사 올라가는 길
육신사 박물관
달성 하빈 묘리의 육신사를 찾아 보게 된 이유는 순천박씨 박팽년의 후손으로 달성군 하빈면 묘리 출신으로 왕산의 맏며느리 박노숙(1888~1979)에 대한 기록을 알고 싶어서다. 그는 왕산의 장자 허학과 결혼하면서 구미 임은동으로 시집왔다.
만주 망명길에 오른 박노숙은 연해주까지 이동하면서 남편 허학(애국장)과 10대의 어린 두 딸을 데리고 강제 이주 열차에 올랐다. 막내 시동생 허국의 가족도 함께였다. 허국의 부인(이후석)은 석주 이상룡(독립장)의 손녀다. 이준형(애국장)과 이중숙의 셋째 딸로 열한 살 어린 나이로 만주로 와서 17세 무렵 왕산 허위의 넷째 아들 허국과 혼인하였다.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 당한 후의 삶은 만주 망명 보다 더 처절했다. 스탈린 정권이 한인 지도자와 지식인 2,500명을 숙청하거나 처형하였는데 박노숙의 남편도 그중 한 사람이 되었다. 이어 1941년 동서 이후석 마저 42세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허로자는 이렇게 회고한다.
남자들을 대신해 아이들을 키우고 생계를 꾸리고 버티던 막내 숙모(이후석)가 약 한 번 써보지 못하고 결국 병으로 죽고 말았다. 독립운동가의 집안에서 태어나 독립운동가의 집으로 시집가서 모질게 버텼지만, 끝내 카자흐스탄에서 주검이 되었다.
99칸 대저택인 안동 임청각 셋째 딸로 태어나 모진 망명 생활 끝에 그리던 고향 가족들과는 영영 만날 수 없는 운명의 삶을 산 것이다.
또한 그 힘겨운 세월을 살아낸 박노숙은 1979년 92세의 나이로 머나 먼 이국 땅에서 숨을 거두었다.
왕산 허위의 맏형이자 종손인 허훈은 3,000 마지기 (약 60만평) 땅을 팔아 의병 창의 군자금으로 내놨고 자신도 직접 진보 의병장으로 참전하여 안동 영양 영덕 청송지역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도산서원과 병산서원의 원장 직을 맡기도 했다.
— 소릉하 (@metempirics) December 11, 2019
출처: https://t.co/EDpXPRZxRj
왕산의 첫째아들 허학의 둘째 딸 허로자의 외삼촌 조카인 박돈규(대구 시의원) 씨의 고모가 바로 허로자의 어머니 박노숙이다.
왕산선생기념관에 있는 유품들은 자손들이 만주로 망명하면서 허학선생이 처가에 맡겨 둔 것을 다시 찾아온 것이다.
해방 후 그 유품들을 허씨네 가문에 전달하게 되어 지금 왕산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박팽년 후손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고종의 칙명등 소중한 왕산의 유품들은 남아 있지 않았을 수 있다.
왕산의 유품들을 허학의 처가에 보관할 당시 그 유품들을 보관하는 것을 일본인들에게 발각이 되었더라면
박팽년 후손 집안도 멸족을 당할 위험을 무릎쓰고 보관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박돈규 전 대구시의원이 허학선생의 처(박노숙) 조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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