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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 역사 사회

왕산 허위 의병장 친손녀 허로자 여사 별세

대한민국 독립전쟁의 포문을 연 의병전쟁을 이끈 13도 창의군 총대장 ‘왕산’ 허위 선생의 둘째 손녀인 허로자 여사가 지난 26일 향년 95세 숙환으로 별세했다.

 

소식을 전해들은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 회원들은 빈소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사정을 백방으로 알리기 시작했으며 이 소식은 구자근 국회의원이 관내 기업에 알렸던 바 구미 대표기업중 하나 LS전선에서 모든 장례비용을 담당키로해서 빈소가 마련되었다.

 

빈소는 중앙보훈병원 208호실에 마련되었으며 문재인 대통령, 황기철 국가보훈처장,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소장, 구자근 국회의원, LS전선 구본규 대표이사 등이 조화를 보내 고인을 추모했으며 국민의 힘 대통령 후보는 조기를 보내왔다.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 회원 3인은 이날 밤 서울 중앙보훈병원 빈소를 찾아 상경하였으며 밤늦게 조문을 마치고 장의 일정을 상의 한 후 다음 날 새벽 5시경 다시 구미로 돌아왔다. 

 

27일 밤늦게 구미에서 올라와 고인에게 조문을 하는 신문식 구미시의원

 

 

허로자 할머니 빈소를 마련하고 장례비등을 모든 비용을 부담한 LS전선 구본규 대표이사

 

대한제국의 의정부 참찬등 최고위직을 지낸 고관대작 신분으로 유일하게 의병을 일으켜 13도 창의군을 결성한 허위 선생은 경북 선산 출신으로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고종의 어명으로 의병을 모집한 뒤 서울진공작전을 펼치며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서울진공작전 실패 후 파주, 연천 적성등 경기 북부 지방에서 의병 활동을 지속하다가 결국 일제에 피체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54세의 일기로 순국했다.

 

허위 선생의 자손들은 일본의 추적을 피해 만주, 연해주 등지로 뿔뿔히 흩어져 살았다.

 

만주 망명길에 오른 왕산의 맏며느리 박노숙은 연해주까지 이동하면서 남편 허학(애국장)과 10대의 어린 두 딸을 데리고 스탈린에 의해 강제 이주 열차에 올랐다.

 

막내 시동생 허국의 가족도 함께였다. 허국의 부인(이후석)은 석주 이상룡(독립장)의 손녀다.

 

이준형(애국장)과 이중숙의 셋째 딸로 열한 살 어린 나이로 만주로 와서 17세 무렵 왕산 허위의 넷째 아들 허국과 혼인하였다.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 당한 후의 삶은 만주 망명 보다 더 처절했다. 스탈린 정권이 한인 지도자와 지식인 2,500명을 숙청하거나 처형하였는데 박노숙의 남편도 그중 한 사람이 되었다. 

 

이어 1941년 동서 이후석 마저 42세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허로자는 이렇게 회고한다.

 

남자들을 대신해 아이들을 키우고 생계를 꾸리고 버티던 막내 숙모(이후석)가 약 한 번 써보지 못하고 결국 병으로 죽고 말았다. 

 

독립운동가의 집안에서 태어나 독립운동가의 집으로 시집가서 모질게 버텼지만, 끝내 카자흐스탄에서 주검이 되었다.

 

99칸 대저택인 안동 임청각 셋째 딸로 태어나 모진 망명 생활 끝에 그리던 고향 가족들과는 영영 만날 수 없는 운명의 삶을 산 것이다. 또한 그 힘겨운 세월을 살아낸 박노숙은 1979년 92세의 나이로 머나 먼 이국 땅에서 숨을 거두었다.

 

2006년 우즈베키스탄을 방문 중이던 한명숙 당시 국무총리를 만나게 되면서 허로자 할머니는 한국으로 영구 귀국을 하게되지만 그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당시 국가 보훈처의 무성의한 일처리로 종로 낙원상가 뒷골목 허름한 여관에서 허위 의병장의 친손녀가 오랫동안 기거하기도 했다.

 

허로자 할머니의 아버지 허학선생(애국장)은 자형인 이기영 선생과 함께 독립의군부 군자금 모집을 주도했으며 부친인 왕산 허위 선생이 순국하자 숙부 성산 허겸을 따라 만주로 가서 동화학교 등을 설립하고 신민부 참의원을 지내는 등 독립군을 이끈 항일 투사이다.

 

허로자 하머니가 열 네살 무렵 스탈린의 소수민족 말살 정책으로 당시 지식인으로 분류 되었던 허학은 54세의 나이로 운명을 달리한다.

 

아버지의 죽음 후 허로자 할머니는 말로 못할 고초를 겪었다. 열두살 무렵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될 때 동상을 당해 한쪽 다리에 심각한 후유증을 갖게 되었고 경제적 고통과 고려인이라는 이유로 멸시와 천대를 받았다.

 

허로자 할머니가 80세 나이에 한국 국적을 되찾고 귀화를 결심하게 된 이유는 "아버지의 업적을 널리 알리고는 것이 효도 하는 것이고 아버지가 살았던 흔적을 남기고 싶고 할아버지가 목숨 바처 사랑했던 이 나라에 조상의 혼을 심고 싶다" 라고 밝힌 적이 있다.

 

허로자 할머니가 2011년 대구 달성공원의 왕산순국비와 구미 왕산허위 기념관을 둘러 보고 난 후 이 곳에 아버지 허학을 기념할 수 있는 조그만한 비석이라도 세우는 것이 마지막 소망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생전의 허로자 할머니 모습

독립운동가 왕산 허위 선생의 이름을 따 지은 광장과 누각 등 명칭을 갑자기 동네 명칭으로 변경해 논란이 되고있다.


왕산 허위 선생 가문은 3대에 걸쳐 14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대한민국 최고의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한국수자원공사는 3만㎡의 물빛공원에 왕산광장(8천㎡)과 누각 왕산루, 독립운동가 14인의 동상을 완공했다.

 

구미시는 남유진 전 시장 때 주민공청회 등을 열어 물빛공원의 광장, 누각, 동상 명칭을 선생의 호인 왕산을 따 짓기로 결정했다. 구미의 역사성을 살린다는 취지에서다.

그러나 장세용 구미시장이 취임 이후 "인물 기념사업을 태생지 중심으로 해야 한다"고 요구하면서 지역명인 산동면을 따서 산동광장과 산동루로 변경하기로 했다.

 

(구미) 왕산 허위 가문 독립운동가 14인 기념사업 지우는 구미시 논란 커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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