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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사 역사

동북항일연군 3로군 총참모장 허형식 장군과 협객 관려화

허형식은 1909년 경상북도 구미 임은동에서 출생했다. 

 

철길 하나 건너면 일본 왕에게 충성 혈서를 쓰고 일본군 장교가 되어 독립군을 잡으러 다니던 친일파 박정희가 태어난 상모동이다. 

 

박정희는 허형식 보다 8살 어리다. 허형식은 구한말 13도 창의군 총대장으로 일제 통감부를 치기위해 서울진공작전의 선봉에 선 왕산 허위의 당질(사촌형제의 아들)이다.

 

왕산 순국 후 임은 허씨 일족이 만주로 망명을 갈 때 가족과 구미를 떠난 그는 만주에서 자랐고 1930년 하얼빈에서 일본 총영사관을 맨손으로 급습해 1년간 수감됐다. 출소 후 항일전사로 거듭났다.

 

1935년 동북인민혁명군 단장, 1936년 동북항일연군 정치부 주임, 1939년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군장을 맡으며 만주 항일투쟁을 주도했다. 동북인민혁명군과 이름을 바꾼 동북항일연군은 한·중 통합 군사기관이었다. 

 

1941~42년 일본군의 토벌이 심해지자 동북항일연군의 상당수 지휘관은 소련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허형식은 끝까지 만주에서 저항했다. 일제는 고액의 현상금과 1계급 특진을 내걸었다. 당시 그가 ‘만주 최후의 항일 파르티잔’으로 불린 이유다.

 

결국 그는 1942년 8월 북만주 칭안현 계곡에서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전사했다. 일본군은 그의 머리만 떼어가고 시신은 방치했다.

 

한편 허형식은 이육사 어머니(허길)의 사촌동생이다. 이육사가 나이가 다섯살 많았지만 허형식을 존경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둘 다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했고, 사회주의 성향을 보였다. 이육사가 1930년대 말 만주에서 당시 백마를 탄 허형식을 만났다. 

 

백마를 탄 허형식의 인품에 매료돼 광야를 썼다는 증언이 있다. 허형식 누이의 외손녀인 심송화는 2004년 ‘백마 타고 사라진 허형식 할아버지’란 시를 남겼다. 이 때문에 일부 연구자는 ‘백마타고 오는 초인’이 허형식을 모델로 한 것이라고 추정한다. 

 

 

 

허필 애국지사 건국포장 10년 만에 손자에 전수

대구지방보훈청(청장 박신한)은 지난 18일 대구시 동구 신암동 허창수씨 자택에서 ‘독립유공자 포상 전수식’을 가졌다.이날 백해숙 대구보훈지청 보훈과장은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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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형식 장군의 아버지 시산(是山) 허필(許苾) 애국지사는 한말 의병대장 왕산(旺山허위(許蔿)의 사촌 동생으로 허위가 순국한 뒤그의 형 성산(性山허겸(許兼) 및 그 일족인 범산(凡山허형(許蘅등과 함께 1915년 고향 구미 임은동을 떠나 만주로 이주하였다

 

시산 허필(1855~1932)은 한학과 의학에 조예가 있어 만주에서 한약방을 열어 일가를 부양하고 독립운동을 도왔다. 허필의 둘째아들 허형식(1909~1942)은 독립운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허형식 장군의 아버지 시산 허필 선생의 건국훈장 건국포장 (대구에 거주하는 시산 허필 선생의 손자 허창수씨에게 서훈 받은지 10년만에 전달되었다. 허창수씨는 허형식 장군의 친조카다)

 

허필은 1922년 만주에서 무장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국내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한 공훈으로 2010년 독립유공자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왕산 허위 가문은 3대에 걸처 14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하였으며 대한민국 3대 항일가문 중에서도 가장 돋보인다..

 

 

중국 정부는 1998년 허형식기념비를 세웠고, 2014년 항일영웅열사 명단에 올렸다. 만주에서는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흑룡강성 경안현 대라진 소릉하 입구에 세워진 허형식 장군 희생지 기념비에서 허형식 장군의 고향에서 온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 회원들이 2019년 8월 3일 77년만에 장군에 대한 추모 행사를 했다. (사진/전병택)

 

 

 

허형식 장군이 전사한지 77년만에 추모식을 거행한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 왼쪽부터 오상원, 장명순, 문명숙, 김병길, 김도화, 신문식, 전병택, 장기태, 임재덕, 송성진, 임영태) (사진/윤정우)

 

 

 

 

흑룡강성(黑龍江省) 경안현(慶安縣) 인민공원 내 영렬원에 있는 혁명 열사 기념비 전경. 경안현 인근 지역에서 활동한 허형식 장군의 부하들인 중국 및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의 기념비가 그 뒤에 세워져 있다. (사진/ⓒ전병택)

 

 

 

흑룡강성(黑龍江省) 경안현(慶安縣) 인민공원 내 영렬원에 있는 혁명 열사 기념비 바로 뒤 가장 중앙에 허형식 열사 기념비가 자리잡고 있다. 바로 좌측으로 허장군의 부하였던 박길송 지대장의 기념비도 함께 자리하고 있다. (사진/ⓒ전병택)

 


 

[안동MBC 창사 46주년 보도특집] 독립전쟁 51년 현장을 가다 2부 한국 방송 최초로 공개되는 동북항일연군 3로군 총참모장 허형식 장군 소개편

 

동북항일연군 3로군 군장 조상지가 1938년에 소련으로 갔다가 감금되여 돌아오지 못하자 조상지의 군장직을 허형식이 계승했다. 당시 3군은 동북 항일련군의 11개 부대에서 가장 강대한 부대였다. 이 부대의 최고 군사지휘관에 경북 구미 출신의 젊은 혁명가가 임명된것이였다.

 

하얼빈 시내 동북항일연군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사진, 동북항일연군 3로군 군장 조상지 장군의 후임 허형식 장군의 사진이 3로군 부대원 사진위에 나란히 전시되어 있다. 허형식 장군은 3로군 총참모장과 3군 군장으로 동북항일연군의 최고위급 지휘관에 올랐다. (사진/전병택)

 

1936년에서 1937년 사이의 동북항일연군 조직 서열과 할동 구역 부대원 숫자를 기록한 도표. 하얼빈 시내 동북항일연군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당시 허형식은 3로군 1사 정치부 주임 이희산이라는 이명을 사용했으며 3로군의 병력이 약 6,000 명 정도로 김일성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제2로군 3사장(師長) (북한의 김일성이 아님) 1937년 11월 13일 만주국군 제7단과의 전투에서 전사)] 장군이 2로군 3사 사장으로 활동할 때의 2로군 병력 2,000명 보다 세배나 많았다. (사진/전병택)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조상지의 동북반일유격대 합동지대는 동북인민혁명군 제3군으로 재편 되었다. 

제3군 산하에는 일개 사(師)와 3개 단(團)을 두었다. 

 

조상지/ 3군장 겸 사장, 류곤/정치위원(만주성위의 조직부장이 겸임),풍중운/정치부 주임(주하현 공산당 서기), 

리복림/3군 집법처장, 이희산 (허형식)/제3군 정치부주임 겸 제2단 단장, 리조린/제2단 정치부 주임

 

원안에 있는 앳된 얼굴이 조상지 장군이고 그 옆에 여성이 관려화로 추정되며 바로 그 뒤에 허형식 장군이다.

 

1열 가장 가운데 체구는 왜소하지만 지휘봉을 쥐고 있는 조상지, 조상지 오른쪽에 관려화로 추정되며 바로 뒤에 허형식 장군이 서있다.

 

1940년부터 이듬해까지 일제는 관동군(關東軍)을 40만에서 76만으로 증강하고 소련에 대한 침입을 준비하는 한편, 항일연군에 대한 '토벌'을 더욱 강화했다. 

 

그 결과 1940년 2월 하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총사령 양정우(楊靖宇)의 전사를 전후하여 남만에서의 항일무장투쟁은 사실상 끝났고, 동만지방에서도 이해 말을 고비로 거의 쇠퇴하였다. 

 

다만 허형식과 김책, 장수전 등이 활동하고 있는 3로군의 일부 병력만이 명맥을 유지하는 형편이었다. (장세윤 박사 허형식 연구)

 

 

허형식은 후에 군장까지 되었는데, 허형식이 군장이 되었을 때 항일연군 제 3군은 기본상에서 거의 망해가고 있었을 때였다. 

조상지가 군장을 할때 10개 이상의 사단을 거느렸고 총 대원수는 거의 6천여명 가까웠다. 

그런데 조상지가 소련에 가서 감금되고 허형식이 군장직을 맡았을 때, 허형식의 수하에는 3개 사단밖에 없었다. 

대원수도 1천명 좌우밖에 안되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주석이 된 김일성이 거느리고 다닌 부대가 제일 많을 때가 겨우 1백50여명 되나마나 했다고 들었다. (류순호 작가 글 중)

 

1940~41년, 일제가 관동군을 76만 명으로 증가시켜 소련 진공을 준비했다. 그러면서 동북 일대를 빗질하듯 토벌했다. 이에 동북항일연군이 소련(러시아)으로 피신했다. 김일성·김책·최용건 모두가 소련으로 피신했다. 하지만 허형식 만은 끝까지 일제에 맞섰다. 비행기, 탱크까지 동원한 관동군과 맞서 싸웠다.

 

동북항일연군 교도려 조직에서도 허형식 장군은 3로군 영장 총참모장이다. 제1영의 영장은 김일성, 제3영의 영장은 바로 허형식으로 편제되어 있다. 소련측에서 편제한 교도려 조직은 허형식 장군이 전사 하기전 만들어졌다. 

허형식 장군 아래의 정치담당 부영장이 바로 김책인데 김책은 북한에서조차 김책시라는 지명으로 만들 만큼 유명한 인물이다. 그 김책이 허형식 휘하에 있다.

 

허형식 장군이 희생되었을 때 맨 먼저 달려가서 그 시체를 수습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중 허형식을 해쳤던 토벌대 대대장 국장유(国长有)를 직접 체포하여 총살시킨 여자협객 관려화(關麗華) 이야기

 

허형식이 조상지의 뒤를 이어 항일연군 제3군 군장이 된 뒤에 수화(綏化) 덕도(德都)지방에서 활동할 때, 오래전부터 허형식을 굉장하게 좋아하고 숭배하였던 여자협객이 있었는데 이름은 관려화(關麗華)라고 불렀다. 

오르죤족 여성로써 대흥안령지방에서 이름 날리는 여자 협객이였고 모젤 권총 두자루를 차고 다니는 명사수였다. 허형식의 부대가 대흥안령에서 일본군과 싸울 때 이 여성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관려화는 거의 허형식의 경호병이 되다시피 곁에서 붙어다니곤 하였는데 허형식이 시키는 일이면 어떤 일이나 다 하였다. 

일본군의 정보를 정찰하여 허형식에게 제공하고 또 허형식에게 식량도 날라주고 하였는데, 1942년에 허형식이 경안현에서 사망하고 토벌대가 허형식의 머리를 잘라갔을 때도 관려화가 산속에까지 와서 허형식의 시체를 수습했는데 나무로 머리를 만들어 시체에 붙였다고 하더라. 당시 관려화는 아주 유명했는데 해방후까지 살았다. 


注: 허형식과 관려화의 이야기는 흑룡강성 북부 지방에서 아주 유명했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남 여간의 그런 사랑의 이야기와 거리가 아주 멀다. 

실제로 관려화는 1900년 생으로 허형식보다 나이가 8세 연상이며 허형식쪽에서 오히려 관려화를 누님처럼 존경했다고 한다. 

관려화는 허형식과 만나기 썩 이전에 이미 조씨 성을 가진 남자와 결혼한 사이었고 아들 조국지(赵国志),딸 조봉란(赵凤兰)을 낳았다. 남편은 관려화가 26살 때 병으로 죽었다. 

그 뒤로 다시 출가하지 않은 관려화는 26살 때부터 젊은 과부의 몸으로 항일전장을 누비고 다녔다. (류순호 작가의 글 중)

 

10여전 전 유순호 작가가 쓴 글에 달린 댓글을 하나 소개한다.  댓글을 단 사람들은 글씨체를 보면 중국 동포들인것으로 보여진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던 한국 조선을 다 포함하여 가장 많은 부하를 거느렸던 사람은 허형식장군이였다는것을 사실이 말해주고 있다.

김일성도 많아봐야 150여명을 거느리고 다녔다고 한다. 

김좌진이나 홍범도같은 독립군장군들도 사실상 100여명에서 많을 때 3백여명 이상 넘지못하였다고 한다.

허형식장군처럼 수하에 3개의 사단을 거느렸고 대부분 중국인 항일연군대원들을 데리고 다녔다는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더구나 1920년대 말엽에는 민족주의 계렬의 독립군들은 대부분 사라졌고
1930년대 전반을 공산당의 항일부대를 거느리고 1942년까지 싸웠다는 사실은 허형식장군이야말로 한국과 조선을 모두 포함한 우리 민족의 항일독립전쟁사에서 가장 위대한 제1호 영웅이였다고 말할수 있을것 같다.

더구나 력사상에서 보면 허형식장군이야말로 한국 의병장의 후예이고 일가친척들 모두가 항일운동가들이였다. 너무 위대하고 빛나는 가족이였다.

그동안 이렇게 위대한 우리 민족의 영웅인물에 대하여 우리는 너무나도 아는것이 없었다. 

이런 위대한 인물에 대한 책 한권도 한국이나 조선 그리고 중국과 조선족은 내놓지 못하였다.

작년에 유순호작가의 개인적인 집필작업에 의해 이 영웅의 전기가 세상에 나오게 되였다.

다행스럽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로 부끄럽기도 한 우리민족의 현실이다.
 

국가와 정부의 록을 받아먹고 항일투쟁을 연구한다는 대학교 연구소 박사 교수들은 모두 창피함을 알고 부끄러움을 알아야 할것이다.

동북 열사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허형식 장군이 사용하던 말 안장과, 안경, 그리고 체코제 모제르 권총 등 유품 (사진/ⓒ전병택)

 

중국의 항일투쟁 연구가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허형식은 수천 명 부하를 지휘하였다. 이런 지휘관은 (만주의) 한국인 독립운동가 가운데에는 그밖에 없었다. 김좌진, 홍범도는 많아야 수백 명 부하를 데리고 다녔을 뿐이다.”

 

하얼빈 시내 동북 항일연군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동북항련 기병대원들이 말을 타고 이동하는 장면. 허형식 장군은 백마를 타고 다녔다고 전해진다. (사진/ⓒ전병택)

 

하얼빈 동북항일연군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장총, 동북항련 부대원들 사진의 기마부대원들이 장총을 메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사진/ⓒ전병택)

중국 사이트에서는 허형식 장군을 발음하는 이름인 (Xu Hengzhi) 라고 부른다. 이 사진은 중국 사이트에서 허형식 장군을 소개하는 동북항일연군 3로군 기병부대 이동을 설명하는 글에서 나온 것이다. 

 

체구가 왜소한 사람이 조상지로 추정되며 그뒤에 말 탄 여자가 관려화 일듯 하다. 

흑백 사진이지만 여러 장면에서 백마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사진이 여러군데에서 나온다. 아마 허형식 장군일것 같다.

만주의 설원을 말 타고 질주하는 동북민주연군 기병대. 1947년 겨울, 만주 쑹화강 부근

김일성이 활약했다는 백두산 산악지대는 말을 타고 작전을 펼치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북한에서 김일성이 백마타고 항일투쟁을 했다는 것은 허형식 장군이 백마를 타고 항일연군 기병대를 이끌었다는 만주 일대의 전설같은 이야기를 도용했을거라고 연변의 학자들은 이야기한다.

 

 

 

 

상지시(옛 주하현) 도심 중앙 로터리에 위치한 동북항일연군 3로군 군장 조상지 장군의 대형 기마동상, 조상지 장군을 기려 중국 정부에서는 주하현을 조상지 장군의 이름을 따서 상지시로 바꾸었다. (사진/전병택)

 

 

중국 길림성 퉁화시( 通化市) 양정우 장군 기념 정우 능원 밑에 있는 동북항일연군 기념관, 이곳에서도 허형식 장군의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길림성 몽강현을 양정우 장군의 이름 따서 정우시로 바꾸었다. (사진/전병택)

 

중국답사기행에서 촬영한 동북항일연군 서열표, 3로군 지휘부에 3로군 총참모장 허형식 이름이 새겨져 있다.

 

중국 길림성 퉁화시 (通化市) 동북항일연군기념관에 당시 지휘관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허형식 장군(1909 - 1942)의 이름이 밑에서 네번째 새겨져 있다.

 

 

중국 방송에 나온 허형식 장군 소개, 중국에서는 요즘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대대적인 선양사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시진핑등 중국 수뇌부들도 동북열사박물관 찾아 참배하고 중국 역사의 정신적 기둥으로 삼으려는 사업이 활발하다

 

중국에서는 영웅 열사 300인에 포함되어 국가적 영웅으로 추앙받는 허형식 등 동북항일연군내 한인들의 활동은 현재까지는 주로 한국내 굴곡진 정치사로 인해 중국과 북한에서만 연구와 기념사업이 활발히 이루어 지고 있고 한국에서는 거의 잊혀진 상태였다. 

 

근래에 들어 박도 작가의 실록소설 '허형식 장군', 동북아 역사재단의 장세윤 교수 논문, 연변 출신 유순호 작가의 '만주 항일 파르티잔'등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하고 있다.

 

장세윤 교수는 "허형식을 비롯한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한 한인들의 행적을 고찰하여 한국근대민족운동사의 한 갈래로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다" 고 말하며 " 중국 관내(關內)지역에서 활동한 임시정부와 광복군,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처럼 독자적 조직체를 결성하지는 못했다고 해도 동북항일연군의 일원으로 활동한 한인들은 분명히 이 시기 중국에서의 3대 민족운동세력으로 간주될 수 있다" 고 주장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는 2019년 4월 2일 대구지방보훈청에 구미시 임은동 출신 동북항일연군 제 3로군 총참모장 허형식(1909~1942) 장군에 대한 독립유공자 포상을 신청했다. 그러나 보훈처는 반려했다.

 

참고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작전참모 출신 최윤구  독립운동가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서훈 받았다.

<최윤구는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제2사 제1연대장, 1936년 1월에는 동군 제2사 사령 등을 역임하면서 동북인민혁명군과 연계한 전투에 참가하면서 커다란 전과를 거두고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에 참가하여 동북항일연군 참모로 활동하던 그는 1938년 12월 일만군과 전투를 벌이다가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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