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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사 역사

을사오적(乙巳五賊) 다섯 명의 매국노 주살하라고 상소 올린 왕산 허위 선생

을사오적(乙巳五賊)은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에서 을사늑약의 체결을 찬성했던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의 다섯 명의 매국노를 일컫는 말이다.

 

1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친일파들이 득세하며 민족정신을 훼손하며 온갖 패악 발언을 서슴치 않는일에 개탄하며 을사늑약 전후 당시 상황에 을사오적등 친일파의 목을 베라는 상소를 올린 왕산 허위 선생의 글을 소개한다.

 

 

을사늑약(1905년) 체결전 성균관 박사 재임중인 1903년 4월 20일 송수만 윤이병 이상천 정훈모 박정빈 김연식등과 연명으로<論時事疏> (시사를 논하는 상소)를 올려 자강개혁론을 주장했던 왕산 허위(1855~1908)는 당시 러시아와 일본의 대립 구도속에서 자주국의 주권을 지키려면 내정과 외교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 개혁을 추진하려면 먼저 친러파와 친일파의 우두머리인 이용익과 이근택을 주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왕산 허위는 <논시사소>에서 대한제국이 당당한 자주국임을 밝히고 러시아와 일본의 침범은 우리나라가 약하고 정사가 바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하 권대웅 교수의 왕산 허위 일부 발췌>

 

<아래는 논시사소중 일부>

 

대저 당당한 자주국가이건만 강성한 이웃이 틈을 엿보다가 업신여기고 위압하는 짓을 한번 부리고 두번 부려서 그칠 줄 모름은 우리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약함은 땅덩이가 작기 때문이 아니고 인민이 적기 때문도 아니며 재력이 가난하기 때문인 것도 아닙니다.

정사가 밝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단마(덴마크), 포아(포르투칼)같이 작은 나라도 일찍이 남의 압제를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대개 예부터 그 나라를 잘 다스리는데 다른 나라가 와서 침범했다는 것은 들은 바가 없습니다. 임금과 신하가 한마음으로 백성을 편하게 하고 근본을 굳히면서 공평하게 정사를 시행하고 신의로써 이웃 나라와 교섭한다면 외적이 어찌 스스로 오겠습니까? 

오직 그렇게 못해서 조정의 정사가 어지럽고 백성이 밑에서 원망하며 군중이 배반하고 친척이 이산하여 위태롭게 됨으로 스스로 지탱하지 못하옵니다. 이에 외국 세력에게 기대어서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다가 화란이 잇달아 나오듯이 형편이 반드시 그렇게 됩니다.

 

허위는 당시 대한제국을 둘러싼 러시아와 일본의 열강 대립의 각축을 파악하고 외교의 방향을 중립적 외교 노선을 선택하는 것이 자주국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페하 앞에서는 매양 러시아 세력을 강조하다가 일단 합문을 나서면 다시 일본 공사관으로 달려가 꼬리를 흔들며 애걸해서 제 몸 온전하기만을 도모합니다. 왜당과 러시아당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이른바 러시아당이 왜당입니다.

내장원경 이용익과 경위총관 이근택이 바로 그런자입니다. 먼저 두사람의 머리를 벤 다음이라야 내정을 바르게 할 수 있고 외적을 막을 수 있어서 국가가 지탱해나갈 희망이 있을것입니다.

 

위의 논시사소 상소에서 보듯이 러시아에 붙었다 일본에 붙어 아첨하는 대신들의 목을 베라는 상소를 고종에게 올릴 정도로 왕산 허위의 기개는 대단하였다.

 

이후에도 <재소>를 올려 당시 간신배 이용익과 이근택의 머리를 베어 거리에 매달아 국민들의 분노를 풀어달라고 주청하기도 했다. 

 

그리고 1904년 5월 28일 평리원 수반판사에 임명되고 평리원 판사직의 이름으로 이상천 박규병 김연식 정훈모등이 연대 서명한 <배일의거통유문>을 전국에 발송한다. 이 통유문은 일본의 한국 침략을 폭로하여 규탄하고 나아가 전국적으로 일본에 맞서 일어날 것을 호소하는 것이었다.

 

특히 을사오적은 매국노의 대명사로 이후 숱한 암살 위협에 시달렸다. 을사오적을 처단하자는 일에 왕산의 형 성산 허겸도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을사조약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1905년 10월 21일 이완용·이근택 등의 오적 암살 사건에 가담하여 투옥되었다가 유배되기도 했다.

 

또한 허위의 사촌 형님이자 이육사 시인의 외할아버지인 범산 허형(1843~1922)은 1906년 3월 나인영·오기호 등이 을사오적 암살을 모의하던 중 거사 계획이 드러나 검거된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기도 했다. 허형은 당시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이 피자(被刺)된 사건의 혐의를 받고 있었다.

 

 

 

 

13도 창의군을 만들어 서울진공작전을 펼치는등 나라를 되찾는 일에 온 몸을 던진 왕산 허위는 1907년 10월 19일 친일파 이완용이 내린 체포 명령에 따라 쫓기는 몸이 된다.

 

목숨바처 나라를 사랑한 선비 왕산 허위 선생의 정신을 받들여서 구미에서도 정신 문화를 개벽시켜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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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장 서훈을 받으신 분인데 왕산 허위 선생의 고향 경북 구미에서 물려 110년 만에 처음으로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 주최로 추모식이 열렸다.

 

 

서울의 을지路..종路.퇴계路.세종路는 누구나 잘 아는 유명한 도로명이다. 하루에 수십 번 교통방송안내에 흘러나오는 왕산로의 유래는 고종황제시 중추원 의관(中樞院 議官), 정삼품 통정대부(正三品 通政大夫), 평리원 수반 판사(平理院首班判事), 재판장 서리 [현 대법원장에 해당],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 비서원 승(현 국무총리 급)을 지낸 왕산 허위선생을 기념하기 위해 지어진 도로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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