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전투는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 사이에 청산리 일대에서 홍범도(洪範圖)의 연합부대와 김좌진(金佐鎭
1889 -1930)
의 북로군정서군(北路軍政署軍)이 연합하여 백운평전투(白雲坪戰鬪)를 비롯하여 10여 차례 일본군과 싸운 전투이다.
김좌진은 1915년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참여하여 독립운동 전선에 나섰다. 대한광복회의 목적은 독립전쟁을 통해 조국을 독립시키는 것이었다. 광복회원들은 원수 일본을 몰아내고 국권을 회복하는 것이 우리 민족의 의무이며, 강토회복과 광복은 당연히 도래한다는 신념을 잃지 않았다.
대한광복회 부사령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띠고 만주로 떠난 김좌진은 1919년 3월 「대한독립선언서」에 대표로 서명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이상 독립기념관 자료)
독립기념관 사료를 살펴 보면 김좌진 장군이 대한광복회 부사령이라는 설명은 나오지만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의사에 대해선 언급이 없다. 그래서 이들의 인연관계를 다음과 같이 살펴본다.
박상진(1884 -1921)은 1902년 왕산 허위(許蔿)선생에게 한학을 배운 후 양정의숙에 진학, 법률과 경제를 전공하고, 판사 시험에 합격하여 평양법원에 발령되었으나 사퇴하고 광복회 총사령으로 무장독립투쟁을 이끈 독립투사다.
박상진 의사의 삶을 재조명하는 창작 오페라 <박상진>이 공연합니다.이 공연은 전석 초대로 진행되니, 관람을 원하시는 분은(울산MBC 052-290-1160,1115)으로 연락주세요.#장작뮤지컬 #박상진 pic.twitter.com/SStPS8YJJ6
— 국가보훈처 (@hun2day) November 3, 2015
박상진 의사는 구미 출신 13도 창의군 왕산 허위 의병 총대장이 1908년 10월 21일 순국한 후 스승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루기도 했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의 포문을 연 의병전쟁에서 최고봉을 장식한 인물인 왕산(旺山) 허위(許蔿)선생은 구미가 낳은 항일의병장이다.
당시 허위의 사위 이기영과 아들 허학등은 일경에 쫒기는 몸이라 제자인 박상진의 주도하에 고향 구미 임은동에서 치른 허위의 장례에는 만사(輓詞, 고인을 추모하여 지은 글)와 제문(祭文)이 장례기간 동안 이어졌고, 상여 뒤를 따르는 만장(輓章)이 십리를 이었다고 한다.
스승인 왕산 허위 순국 후 독립투쟁활동을 하던 박상진 의사는 군사력과 자금 필요성을 깨닫고 1911년 신의주와 안동현에 안동여관을 설치했으며 독립운동기지가 필요하자 자신의 전답 900마지기를 팔아 대구에 상덕태상회를 설립했다. 이 상회는 박상진·김덕기·오혁태 이름을 딴 곡물상회였다.
마침내 그는 1915년 음력 7월 15일, 32세에 대구달성공원에서 대한광복회를 결성하고 총사령에 추대됐다. 그때 백야 김좌진 장군을 부사령으로 임명한다. 김좌진 나이 26세때였다.
무장독립단체 대한광복회를 결성한 박상진은 채기중과 함께 대한광복회 만주지부를 만들어 활동할 즈음 왕산의 형인 성산 허겸은 길림광복회를 조직할 때 박상진과 이관구를 이어주는 역할을 했다.<대한광복회 만주지부의 설치와 활동>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32)과 의기투합한 김좌진(26)은 의형제를 맺는다. 또한 이무렵 박상진을 흠모한 21살 청년 김원봉은 장차 무장독립운동단체 ‘의열단’을 조직하여 일제 고관대작과 친일파를 처단하여 광복회 강령을 계승한다.
광복회 결성 2년 후 1917년 8월 광복회 총사령관 박상진은 김좌진을 만주 총책임자로 임명하고 현재가 약 10억의 군자금을 지원하여 만주로 파견한다.
광복회 박상진 총사령관이 김좌진을 만주로 파견한지 3년 후 국치 이래 독립군이 이룬 가장 빛나는 청산리대첩을 이끌어 냈다.
1920년 10월 21일, 독립전쟁 사상 최대 규모의 승리로 기록된 ’청산리 전투‘가 벌어진다. 6일 동안 10여 차례 전투에서 써내려간 백전불패의 신화. 그런데 청산리 전투를 치른 것은 김좌진 부대만이 아니었다? 바로 오늘 밤 9시 40분 #역사저널그날 ’1920 청산리 독립전쟁‘에서 만나보세요! pic.twitter.com/dfwQDR9U9t
— 역사저널,그날 (@history_theday) May 12, 2019
독립군은 1920년 6월 봉오동과 10월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봉오동 전투로 일본군은 157명이 전사하고, 200여 명이 중상을 입었다. 반면 독립군에서는 전사자 4명, 중상자 2명에 그쳤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발표에 따르면 청산리 대첩에서 일본군은 1,200명이 전사하고, 2,100명이 부상했다. 독립군 전사자는 130명, 부상자는 220여 명이었다. 항일 무장 투쟁사에서 가장 빛나는 최대의 승첩(勝捷)이었다.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으려는 항일 독립군들에게 최선의 방법은 최신 무기를 많이 확보하는 것이었다.
청산리 대첩의 대승의 중요한 무기확보는 1920년 2월이 체코군단이 볼셰비키 정부와 정전협약을 체결하고 배편 대신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본국으로 철수하기로 했을 때 이루어진다.
이들은 무기를 팔아 여비를 마련하려 했는데, 이때 만주와 연해주 일대의 최대 독립운동 조직이던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가 사겠다고 제의해왔다.
독립군이 체코군단으로부터 사들인 무기는 박격포 2문, 기관총 6정, 소총 1천200정에 탄약 80만 발이었다. 당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군대를 상대로 쓰려던 이 무기는 일본군을 상대로 불을 뿜게 된다.
청산리 대첩의 주인공 중 한명인 이범석(李範奭) 대장은 자신의 회고록 『우등불』에서 독립군 무기가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에서 구입했다는 사실을 회고했다.
체코 군단에서 구입한 무기를 수송하는 작전의 책임자는 김좌진(金佐鎭)과 이범석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에서 활약하던 이우석(李雨錫)이었다.
독립운동가 최재형을 기리는 뮤지컬 '페치카'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다.
— 소릉하 (@metempirics) February 1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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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체코 군단과의 무기거래협상에는 연해주에서 한인사회를 이끌던 최재형(崔才亨)이 나섰다고 한다.
그는 어린 나이에 블라디보스톡에 이주해 선원, 무기공장 노동자로 고생한 끝에 군수산업으로 돈을 벌어 안중근 의사를 후원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독립운동을 후원했다.
흥미로운것은 왕산 허위 의병장 순국 후 만주로 망명길에 나섰던 허위의 아들들과 그 가문이 만주에서 독립운동기지 건설사업에 매진하면서 석주 이상룡, 일송 김동삼 그리고 박상진 총사령, 김좌진 장군등과의 인연을 계속 이어갔다는 점이다.
특히 허위의 2남 허영과 3남 허준은 영안현 해림진 산시역 앞에 있는 백야 김좌진과 같은 집에서 함께 살았다.
왕산의 장손자 허경성(93)옹의 부친 허영은 흑룡강성 영안현 산시에서 김좌진 장군과 같은집에서 살았으며 청산리 전투에 참전하였다고 한다.
허경성(1927년생)과 그의 동생들(순성,도성)도 부친이 김좌진 장군과 같은 집에서 살 때 영안현 산시에서 태어났다.
해방후 도문시(투먼시)를 거처 두만강을 건너 귀국하였으며 그 당시 소련군의 진군으로 급히 귀국하느라 부친 허영과 생이별을 하게되고 소식이 끊기게 된다.
청산리 전투에서 대승 후 김좌진이 북만주 영안현 해림진 산시로 돌아와 1925년 신민부를 조직하고 뒤이어 들어온 김규식 장군도 신민부에 참여하였다.
허준은 영안현 해림진을 중심으로 김좌진,김규식,이범석,오광선 등과 함께 활동하게 되었다.
허준은 서간도에서 신흥무관학교의 총무부장 또는 경리부장을 맡으면서 백서농장을 관리할 때 부터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서간도의 서로군정서가 청산리 전투에 참여했을 때 독립군으로 활동하였다.
김좌진은 1930년 1월 24일 북만주 산시역(山市驛) 앞 자택 가까이에 있는 정미소 에서 박상실(가명) 진짜 이름은 공도진, 혹은 이복림에 의해 암살당한다. 이후 김규식도 암살당한다.
1930년 전후 북만주 한인사회에서 김좌진과 김규식의 암살은 허준에게 있어서 큰 타격이었다.
허준은 김좌진.김규식 등이 조직하여 주도하던 독립전쟁을 주도하던 단체의 직책을 맡지는 않았지만 항상 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후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분신과 같은 존재였다.
또한 허준 일가에 있어서 정신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종숙부 시산 허필의 아들 허형식이었다. 1936년경 허형식이 주하현 하동농장에 총상치료 차 비밀리에 머룰고 있을 때 당시 9살이던 허준의 둘째 아들 허웅배가 수발하였다.
이 당시에는 만주일원에서 활동하고 있던 항일투쟁의 명장인 허형식, 조상지, 김일성, 이계동, 마점산등의 명성이 자자하던 시기였으며 어린 허웅배 조차 허형식을 숭배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허웅배의 <허진회상기>에는 이런 기록을 남겨두었다.
밤에 주하(현 상지시)의 대동병원 신의사가 와서 몸에 총알을 뽑아냈고 몸조리를 하느라 집에 머물고 계셨다.(중략) 나는 또 아저씨(허형식)에게 앞으로 나도 아저씨와 함께 반일전쟁에 참가하겠다는 의견을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좋은 생각이라시며 앞으로 그런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공부를 하고 많이 배우고 몸을 단련하고 정신을 수양해야 할 때니 거기에 힘을 다하라고 말씀해 주시었다.
(중략) 나는 아저씨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들었고 그 뜻을 잘 알아들었다. 갑자기 내가 껑충 뛰어 한 열살 더 먹은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어른들께서 그나마 보통 어른이 아닌 그분으로부터 이런 훈계를 받는 것을 더 없는 영광으로 자랑으로 생각하였다.
- 권대웅 교수의 왕산 허위 일가의 망명과 독립운동중에서
민족부흥을 위해 영웅열사의 계보를 이으며 白山黑水 (백두산과 흑룡강) 사이에서 수많은 전투를 벌인 영웅 - 허형식 이라고 중국방송이 소개하는 장면에서 그동안 국내에 알려지지 않았던 허형식 장군의 30대 무렵 동북항일연군 3로군 총참모장겸 3군장 시절 사진이다.
허준의 아들 허웅배가 쓴 <허진회상기>에는 이들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영안현 해림진에 있을 때 우리는 백야 (김좌진)와 한집에서 살고 있었다. 나는 어릴 때 백야의 가슴에 보듬키며, 안기며 자랐다고 한다.
웅배(雄倍)라는 내 이름도 바로 그가 지어준 것이다. 즉 배달(倍達) 나라의 영웅(英雄)이 되라는 뜻에서이다.
형 광배(光倍)라는 이름도 배달나라의 빛이 되어라는 뜻으로 마찬가지다.
또 아버님이 형님으로 모시고 있던 분 중의 한 분이 노은 김규식 장군이시다.
그와 우리 집과의 인연은 수십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 군대에 해산령이 내리자 김규식 선생은 의병부대로 찾아와 조부 왕산(旺山)의 휘하에 들어 오게 되었다.
그는 몸이 건장하고 힘이 장사였다. 조부 왕산께서 진중에서 몸이 불편하실 때에는 김규식 장군께서 직접 조부님을 등에 업고 행군하신 일이 자주 있었다고 전해 듣고 있다.
러시아에 가실 때에도 아버님은 김규식 장군과 많은 경우에 행동을 같이 하셨다. < 허웅배, 허진회상기 옮겨적음>
대한 광복회 박상진 총사령의 왼팔 김좌진 장군 - KBS 1TV 역사 저널 그날의 패널들도 "박상진이 없었다면 청산리 대첩도 없었을 수도 있다" 라고 평가한다.
물론 왕산(旺山)이 없었다면 광복회 총사령관 박상진도 없었을것이다.
왕산(旺山) 허위 의병대장의 순국 후 만주로 망명을 떠난 구미 임은허씨들의 독립운동은 만주에서도 계속된다.
1922년 일창 허발은 석주 이상룡의 손자 이병화와 딸 허은을 결혼시켰고 이무렵 왕산의 4남 허국도 이상룡의 손녀 이후석과 결혼하면서 왕산가와 안동 임청각의 석주가는 겹사돈이 된다.
왕산의 손위 형님 성산 허겸은 71세의 고령에도 1922년 부하 30명을 이끌고 국내에 잠입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던 중 동대문 경찰서에 붙잡혀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그 후 출옥하여 86세에 재차 주하현 하동으로 들어와 활동하다가 1940년 90세의 일기로 하동에서 서거하였다. 허겸의 묘소는 대전 국립묘지에 있다.
또한 민족시인 이육사의 어머니가 바로 범산 허형의 딸인 허길이며 외삼촌 되는 일창 허발과 일헌 허규와 같이 군자금 운반등 같이 활동하기도 했다.
이육사의 외조부 범산(凡山) 허형은 의병장이며 13도 창의군(十三道倡義軍)의 군사장으로 활약한 왕산(旺山) 허위와는 사촌이다.
구미 왕산가는 방산 허훈, 성산 허겸, 범산 허형, 시산 허필 등 사위, 외척들과 임은허씨 가문 전체가 3대에 걸쳐 항일 운동을 벌인 대한민국의 최고 독립운동가문이다.
박상진 총사령이 김좌진 장군에게 왕산의 가족 이야기를 안했을리 만무한데 이제껏 살펴본 대부분의 언론보도와 자료등은 김좌진 장군 따로 청산리 대첩 따로 박상진 총사령관 그리고 왕산 허위 선생을 이어주지 않고 별개의 기사와 자료들이 주종이다.
왕산 일가의 삶과 항일 투쟁사는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이런 내용을 스토리텔링을 하여 더 많이 알려질 수 있도록 하는 관련 작업이 이어져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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